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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헹가 요가/아헹가 요가 관련 책 공부

아헹가 요가란

by 지금 이 순간의 힘 2023. 8. 16.
아헹가 요가는 몸, 마음, 그리고 감정 모두를 이롭게 하는 하나로 통합된 완전한 경험이다. 아헹가 요가가 가진 동력은 요가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또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줄여 준다는 것에 대한 아헹가의 믿음이다.

 

  요가 수련과 가르침을 병행하던 초기 시절에 아헹가는 내적으로 건조해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계속되는 데 대해 의문을 가졌고, 수련하는 동안 자신의 몸과 지성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연구했다. 내면의 의식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어떤 아사나를 수련하는 중이더라도 정렬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 몸과 내부 장기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거나 조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다. 그리고 바깥의 몸, 피부의 움직임, 몸의 정렬을 엄밀하게 살펴봄으로써 유기체로서의 자기 몸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완전한 균형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없애고 내부 장기와 세포를 원래의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체 내부의 건조함은 사라졌다.

 

 

자기 정렬

  많은 요가 수련자들은 몸이 유연하지만, 몰입이나 성찰 없이 습관적인 방식으로 아사나를 수련한다. 아헹가는 제자들에게 아사나가 단지 육체적 차원에서의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현미경처럼 세밀한 자각과 내적인 통찰이 수반되어야 각 아사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사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각이라는 도구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평균적인 요가 수련생이라면 아사나의 기법이나 원칙과 관련지어 자신의 몸을 자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적 자각의 개발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헹가는 내면의 지성을 일깨운다. 이로 인해 수련생들의 자각이 더 날커로워져서 내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면 타다아사나(산 자세) 수련 중 아헹가는 '두 다리와 발을 함께 모아서 서는 것' 너머로 나아간다. 그는 제자들에게 안쪽의 발과 바깥쪽의 발을 정렬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정렬은 발의 민감도를 높이고 에너지의 균형을 잡아 준다. 이제 수련생들은 무릎의 양쪽 옆을 들어올려서 대퇴사두근이 단단히 죄어지게 하고 나아가 넓적다리뼈에 더 가까워지게 한다. 타다아사나에서 넓적다리가 단단히 죄어지면 상복부와 하복부가 들어올려지게 되고, 이로 인해 흉부와 그 내부의 장기가 힘을 얻는다. 호흡이 저절로 깊어지고 리드미컬해지며, 감각, 마음, 감정에도 상응하는 변화가 온다.

 

 

내면 에너지의 균형

  아헹가의 가르침이 원래 육체를 다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한번 관찰하는 사람으로서는 수련생의 마음이 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다. 선생은 자각, 곧 알아차림에 의해 수련의 성과와 에너지 소모 사이에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마음과 몸을 올바로 활용하면 반드시 에너지를 보존하여 바르게 분배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의 에너지는 두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핑갈라pingala,즉 수리야 나디surya nadi(남성적 에너지/태양)이고, 다른 하나는 이다ida, 즉 찬드라 나디chandra nadi(여성적 에너지/달)이다.

 

  태양은 양의 에너지로 뜨거움과 낮의 활동을 나타내고, 달은 음의 에너지로 서늘함과 밤의 휴식을 나타낸다. 아헹가는 신체의 오른쪽(수리야 나디)과 왼쪽(찬드라 나디) 사이에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정렬과 정확성에 의해 에너지가 작동하게 되며, 이 에너지들의 상호 작용, 혼융, 결합으로 건강과 균형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요가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최적의 에너지가 쓰이고, 그 결과 수행자는 평형상태samatvam에 이르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는 '요가는 평형을 이룬 상태를 말함이다.' 라고 기술한다. 『요가 수트라』를 쓴 현인 파탄잘리Patanjali는 근육, 사지, 관절, 내부 장기, 마음, 지성, 그리고 자아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야 이러한 평형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설한다. 아헹가는 정확한 가르침과 시연을 통해 수련생들이 각 아사나에 의식을 더 많이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은 평형 상태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내적 자각을 통해 아헹가가 깨달은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호흡이 도구가 되어 올바른 시간과 장소에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사나를 가르칠 때에는 정확한 호흡의 가르침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요가 교사들은 파드마아사나(연꽃자세)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숨을 내쉬며 오른쪽 무릎을 굽히고,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의 윗부분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헹가는 내부의 호흡 통로도 제시한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콧구멍을 통해 숨을 내쉬어야 하며, 숨 쉬는 동작이 일어나는 바로 그 부위에서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감지해야 한다. 파드마아사나에서는 호흡과 마음이 주는 영향에 의해 무릎이 이완된다. 무릎이 뻣뻣할 때에는 날숨의 질이 특정한 수준에 이르게 해야 한다. 감각기관을 부드럽게 하고 뇌를 이완시켜 아사나 수련 중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날숨이다. 수행자가 조정을 바르게 하거나 올바른 방식으로 아사나 자세를 취할 때, 주의 집중과 호흡이 동작과 함께 흐름을 이룬다. 주의집중이 이루어지고 호흡이 순수해질 때에만 에너지가 흐를 수 있다.

 

 

순서의 힘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수련생들이 어떤 아사나를 수행해 내지 못할 때가 간혹 있다. 아헹가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아사나로 나아가기 전에 일련의 동작들을 수련할 것을 가르친다. 순서를 정하면 아사나의 정수를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아사나의 유익한 효과를 경험할 수 있으며, 마음의 구조를 향상시킨다. 아헹가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파탄잘리가 제시한 요가의 여덟 개의 가지(아스탕가astanga)가 전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먼저 파탄잘리는 이렇게 말한다. "Ahimsa satya asteya brah-macarya aparigrahah yama(요가 수트라 Ⅱ.30)" 즉, 비폭력, 진실, 훔치지 않음, 금욕, 필요 이상 탐내지 않음이 야마yama의 5개의 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 야마의 원칙들은 우리가 영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올바른 습관을 형성시킨다. 아헹가가 느끼기로 수련생들은 아사나를 수련하는 데 폭력himsa을 동원한다. 이로 인해 근육이 삐거나 관절통, 호흡의 동요, 신체의 불안정이 야기될 수 있다. 선생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뇌와 몸이 마른 흙과 같아서는 안 된다. 이들을 진흙처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성이나 마음이다."

 아행가는 모든 수련생들에게 아사나를 수련하는 동안 자신의 현명한 판단력을 활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아사나를 완성하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또한 수련생들이 자신의 몸의 각 부분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수련생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의의 저울처럼 주의 깊은 지성이 폭력과 비폭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정직하게 수련하기

  마음, 즉 '나'라는 생각과 지성이 함께 모여 의식(치타chitta)을 형성한다. '나'라는 생각에는 의지력, 이기적 자아ego 그리고 겸허함이 포함되어 있다. 의지력에 의해 우리는 고무줄같이 유연한 '나'라는 생각을 이기적 자아에서 겸허함까지 주의 깊게 늘일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겸허함은 뇌를 이완시켜 내적 성찰에 이르게 한다. 그러면 자각과 민감성이 생겨나 수련생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 영혼과 결합하는 것을 돕는다.

 

  아헹가는 제자들에게 진실과 열정으로 수련할 것을 한다. 이 열정이 선생을 요가 수행자로 또 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이러한 진실(사트야satya)의 요소가 없다면 아사나는 기계적으로 반복만을 일삼는 것으로 남게 된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한 아사나 안에서 자각과 정렬을 연구하라고 말한다. 아사나를 수련할 때 오른쪽과 왼쪽을 함께 관찰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부터 에너지를 훔쳐서 더 우위를 점하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쪽이 막히고 둔감해진다.

 

  요가를 처음 수련할 때에는 열의와 혼란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때 수련생들은 열중한 나머지 판단력을 잃고 몸과 마음에 유익한 단순한 자세들을 수련하지 않고 고급 단계의 아사나를 수련하길 열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탐욕(스테야steya)과 소유(파리그라하parigraha)의 한 측면이다.

 

  수련생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련이 소유욕에 물드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신체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강하고 정렬이 더 잘 이루어져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오른쪽은 영양이 과다해지고 왼쪽은 영양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브라마차리야brahmacharya는 브라마Brahma를 아는 것, 즉 영혼에 도달하는 것을 뜻한다. 수련생은 내면에 있는 브라마에 이르려는 목표를 가지고 완전히 몰두하여 요가를 수련해야 한다. 언제나 수련의 목적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수련생은 절제(니야마niyama)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즉 청결, 민족, 고행, 자기에 대한 탐구, 그리고 지고의 존재에의 헌신(이스바라 프라니다나 isvara pranidhana)이다. 수련생은 원활한 혈액 순환과 에너지 흐름을 통해 내적인 청결 상태를 유지하고 내부의 몸의 각 세포를 씻어내야 한다. 건강, 그리고 건강한 삶에 의해 만족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분노, 탐욕, 그리고 욕망을 억누르는 것을 돕고 수련생이 요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아헹가는 쉽게 수련의 길을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규율을 요구한다. 쉽고 안락한 길은 요가 규율의 원칙에 어긋나고 마음을 제한한다. 특정 아사나에 대한 두려움은 마음의 영역을 제한한다. 요가는 몸을 정화하고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음은 올바른 노력에 따르는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고자 하는 열의와 의지력을 지녀야 한다. 

 

 

내면의 눈 일깨우기

  수련생들에게 그들의 행위 기관과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도록 요구하면서 인식 감각들을 인도할 때 아헹가는 모든 생각을 자동적으로 중지하고 내면으로 집중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눈 - 기민함 · 주의(프라나prana)와 자각(프라즈나prajna)을 활용하여 신체의 모든 곳을 관찰해야 한다. 수련생은 신체 안의 모든 곳에 존재해 있어야 한다. 영혼(아트만)은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능력(인드리야indriyas)의 소유주이지만 이 능력들은 즐거움(보가bhoga)을 위해 이용되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순수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자신의 주인을 섬겨야 한다.


  프라티아하라pratyahara는 인드리야를 통제하는 상태이다. 수련하는 동안 우리는 내면의 몸에 완전히 집중하고 마음을 안으로 돌려 지성을 예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식 감각은 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헹가가 "눈은 뇌의 창이며, 귀를 통해 뇌가 밖으로 나간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눈은 시선을 안으로 돌려야 한다. 우티타 트리코나아사나Uthitha Trikona-sana(쭉 뻗은 삼각형 자세)에서는 머리를 위로 돌리고 천장 쪽을 바라볼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전등이나 천장에 있는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눈과 외부 사물 사이에 어떤 결합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눈이 수동적인 상태에 있게 하는 수동적인 내면 응시여야 한다. 그러면 얼굴의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뇌가 긴장과 근심에서 벗어난다. 인식 감각이 이완될 때 뇌는 텅 빈 상태shunya가 된다. 생각하는 과정이 중지되는 것이다. 인식 감각이 내면을 향하면 에너지가 몸속에서 고르게 균형 잡히고 진정한 평형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 아사나가 완전해진다.

 

무심 상태에 이르기

  평정이 이루어지면 몸과 마음이 텅 빈 상태가 되고 신체의 세포에 평온함이, 또 마음에는 안정이 찾아든다. 수련생은 뇌가 생각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을 무심 상태라 한다. 아헹가는 종종 "나는 아사나에서 다라나dharana를 가르친다. 다라나와 디아나dhyana를 위한 토대는 아사나와 프라나야마 수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갑자기 전압이 증가되어 흐르면 전기 장치가 손상될 수 있듯 다라나와 디아나에서 생성된 밝은 에너지도 이와 비슷하게 아사나와 프라나야마를 수련하지 않은 사람의 신경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아헹가는 'Desha bandha cittasya dharana'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신체 중 한곳에 자신의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살람바 시르사아사나Salamba Sirsasana(물구나무서기)에서는 마음이 무릎에 고정될 수 있다. 이 자세에서 수련생은 신체의 눈으로 무릎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대신 현미경처럼 미세한 부분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내면의 눈dharmendriya eyes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의식이 둔감한 부위로 퍼져나가 신체 여러 부분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내면의 눈의 영역을 확장시켜 신체 내부의 평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아사나는 밖에서 볼 때는 육체에 관련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헹가는 제자들이 미세 영역을 볼 수 있는 내면의 눈을 인식하게 만들고, 또 그들의 지성을 길러 준다. 제자들이 아사나 안에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는 시계를 보는 제자에게는 꾸지람을 내리지만 그의 다리가 구부정한 상태로 있는 것은 허용한다. 아헹가는 육체적인 불완전함을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방황하는 마음을 한 점에 집중시키는 동안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이원성으로부터의 자유

  요가의 궁극적 단계에 이른 구도자는 몸과 마음, 마음과 자아self의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아헹가는 이원성이 세 가지 구나gunas(3가지 속성), 즉 타마스tamas, 라자스rajas, 그리고 사트바sattva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본래 신체는 타마스(둔감하고 활기 없는)의 상태에 있고, 마음은 라자스(활기 있고 역동적인)의 상태, 그리고 자아는 사트바(밝게 빛나는)의 상태에 있다. 타모 구나tamo guna(두려움과 고통)는 악덕과 나쁜 습관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아헹가는 아사나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자극한다. 아헹가가 취하는 방법은 신체의 둔감함을 무너뜨린다. 이것은 올바른 자세를 해 보이는 것 같은 그저 기술적으로 정밀한 아사나가 아니라 지성을 일깨우고 순수함sattva guna에 대한 감각을 점차 발달시키는 아사나이다.


  아헹가는 제자들에게 너그럽게 대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 매일 한 시간씩 수련할 것을 강조한다. 또 보조 도구를 사용하여 아사나 수련에서 올바른 정렬과 동작을 배울 것을 적극 권장한다. 통찰력이 자리를 잡으면, 보조 도구를 이용하여 수련할 때 가지는 느낌과 보조 도구 없이 수련하여 그릇된 동작을 할때 가지는 느낌을 비교하면서 성찰이 따르는 독립적인 수련을 해야한다고 그는 믿는다.


  아헹가가 이해한 바로는 기대한 결과를 얻으려면 자신의 기질을 깨달았을 때 요가 수련을 수정해야 한다. 아헹가의 방법을 따르면, 올바른 기법을 적용하게 되므로 타모 구나의 아사나가 라자스의 아사나로 변형될 수 있다. 처음에는 많은 동작과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행해지면 진정한 안정이 찾아온다. 활기찬 아사나는 고요하고 평형을 이룬 아사나가 된다. 이것이 곧 사트바의 아사나이다.


   명상의 과정은 사트바 구나에 달려 있다. 사트바 구나는 고요함을 부르고, 수련생은 아사나와 하나가 된다. 몸과 마음 사이에 자리한 이원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사라짐은 사마디samadhi(진아의 인식)라는 최고의 상태에 도달한 요가 수행자들에게만 일어난다. 그러나 그 씨앗은 아사나와 프라나야마의 수련 속에 뿌려져 있다.

 

 

아헹가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하기 위해 내면의 눈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는 몸 안의 모든 곳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고문헌

B.K.S. IYENGAR YOGA 요가 완전한 건강의 길 (옮긴이 : 현천스님)

아헹가 요가 책 표지